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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사전

임진년 전란 중에도 간신의 적은 왜가 아닌 동포

원균의 모함 상소를 읽은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서울로 압송합니다.
삼도수군통제사라 선조보다 많은 군을 보유하고 있어 원균에게 인수인계를 다 받고 포박을 하라고 지시했고 혹 전투 중이라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시행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도망 다니기 급급했던 선조의 머리도 비상하게 돌아갈 때가 있었습니다.
음력 2월에 옥에 들어가서 고문까지 받고 4월 1일에 옥문을 나왔습니다.

남으로 길을 잡고 내려오며 4월 10일에 악몽을 꿉니다.​

4월 13일 [양력 5월 28일]<계해> 맑다.
일찍 아침을 먹은 뒤에 어머니를 마중 가려고 바닷가로 가는 길에 흥찰방집에 잠깐 들러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 울(蔚)이 종 애수 (愛壽)를 보내면서 "아직 배오는 소식이 없다."라고 하였다. 또 들으니, "황천상(黃天祥)이 술병을 들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왔다."라고 한다. 흥찰방과 작별하고 변흥백(卞興伯)의 집에 이르렀다. 조금 있으니,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갯바위(아산시 염치읍 해암리)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대강 적다.​

1597년 4월 난중일기의 내용입니다.​

악몽을 꾸신 그날에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님은 여수에 내려와 계셨습니다만 아들이 한양 옥에 갇히자 이번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작은 배를 타고 한양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시겠다는 어머니의 연세는 80세가 넘었고 몸도 좋지는 않으셨습니다.
오랜 뱃길에 기력이 쇠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부산에 왜군을 치라는 선조의 명령을 받들고 함대를 끌고 갔지만 지리적으로 우리 군에 치명적인 상황이라 뒤로 빠졌습니다.
원균은 그것을 꼬투리잡아 이순신이 왕명을 거역하고 부하들 또한 그를 따르지 않고 있어 자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내리시면 바로 부산을 치고 왜의 보급로를 끊어 버리겠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원균이 이순신 장군도 고문을 받게 하고 모친까지 돌아가시게 했습니다.

하늘이 캄캄했다.

모친 3년 상을 치러야 하지만 전란 중이라 장군은 남으로 내려갔습니다.
순천에서 상황을 파악하니 원균의 횡포는 글로 적기에도 치졸할 정도였습니다.
며칠을 묵고 귄률 장군이 있는 곳으로 찾아간 날에 원균은 칠천량에서 백여 척의 조선 함대를 가지고도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12척의 역사는 지금부터 쓰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이 옥살이 이후 배멀리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문이 심했다면 수군의 수장이 배멀리로 어려움을 겪었을까?​

칠천량 패전 이후 왜는 정유재란을 일으켰고 그해 8월 전라도를 왜가 짓밟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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