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순간들을 적으면서 설비관리의 예방보전 중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1592년4월13일 부산 앞바다,
총 9진 18만 명에 달하는 왜군이 침략하였습니다.
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으로 상륙하여 조령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을 하고,
2군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경주를 거쳐 함경도로 진격 후 한양으로 진격을 하고
수군인 구토 요시타카는 전라남도 해안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4월14일,
1군은 부산에 분산진성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왜군 장수들은 아침은 군영에서 점심은 부산진성에서 먹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18000여 명의 왜군은 쑤셔 놓은 불개미 집의 개미들과 같이 많았고 사나웠습니다.
이에 맞설 부산진성에는 정발 장군과 600명의 군과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정발 장군은 항상 검은 옷만 입고 있어 흑의 장군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검은 옷은 바로 수의를 이야기하며 전장에서 나는 죽으리라는 각오로 사는 장군이었습니다.
몇 시쯤 되었을까 부산진성에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왜군이 밀려왔습니다.
이미 왜의 침공을 알았지만 600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습니다.
이때 사용한 것이 용발이, 쇠꼬챙이로 성문 앞에 뿌려서 적군이 밟으면 고통을 받고 쓰러지게 한 것이 첫 전투에 유용했습니다.
그것으로 점심을 성에서 먹자던 왜는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나 전력을 재정비했습니다.
18000명 때 600명, 그것도 부녀자까지 돌을 나르고 던진 싸움은 어린아이까지 다 죽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정발 장군의 시신에서는 조선에도 이런 장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동래 산성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4월15일,
고니시의 1진은 동래 산성으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동래 산성은 3000명의 군사가 있는 그래도 큰 성이었습니다.
부산진성에서 피해를 생각해서 동래 산성은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던 고니시는,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성을 지휘하던 송상현 부사는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글을 성문에 내 걸었습니다.
동래성은 하루도 못 버티고 고니시에게 내 주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백성은 뒷문으로 빠져나갔지만, 군사들은 처절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4월17일,
비로소 조정에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류성룡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장군이었던 신립은 이일 장군으로 하여 상주로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명하고 상주에 군 소집령을 알리는 파발을 보냅니다.
4월19일,
조선의 중앙군 60명을 이끌고 이일은 말을 달려 상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군사들이 보이지를 않았고 몇몇 백성들만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은 중앙에 집결하여 군 세력을 뽐내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비상시에는 해당 장소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한양에서 장수가 내려갔습니다.
100년 이상 평화가 있었기에 그런 체계와 기강은 무너져 있었고 이일 장군이 상주에 갔을 때도 이미 모였던 군사들은 왜의 소식으로 도망간 후였습니다.
하지만 의병장들이 상주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4월25일,
상주 북천에는 나라를 위한 이병 800명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왜의 깃발이 보이고 조총 소리가 울리자 큰 함성과 함께 800 영웅은 적진으로 파고들어 적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이일 장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보고 몰래 문경 조령에 있는 신립장군에게로 도망을 갔습니다.
상주 북천전적지에 가면 당시 나라를 위한 분들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웅을 기억해 보면,
윤섬, 홀어머니를 모시는 친구 대신으로 전쟁터에 나와 이일장군의 종사관
권길, 상주판관으로 피로 옷에 이름을 새겨 죽은 후 시신을 찾게 함
박걸, 권길을 도와 의병을 모으던 벗으로 권길이 죽자 그 옆에서 싸우다 전사함
이경류, 그가 타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성남 집까지 달려옴
김종무, 류성룡의 매부로 전투를 위해 수백 리를 달려옴
4월28일,
신립장군은 예상 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로 병력을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립의 병사는 8000명에서 16000명이라고 하였는데 매일 도망하는 군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령은 천하의 관문으로 적이 3배가 아니라 5배 정도 많아야 넘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립이 가장 아끼는 정예부대는 기마병으로 산속 전투보다 평야에서 달리며 싸우는데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전 병력은 탄금대로 이동하고 쉽게 조령을 넘은 왜군과 싸우다 도망한 몇 명 외에 다 전사를 하였습니다.
4월30일,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옮깁니다.
백성을 버리고 간 왕에 대한 분노로 한양의 궁궐은 불타버리고 5월2일 고니시는 무혈입성을 합니다.
당시 전쟁은 적국의 왕만 잡으면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양을 함락해도 끝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5월7일,
옥포/합포에서 이순신 장군이 도도 다카토리 수군을 박살내면서 비로서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정유재란까지 명나라와 왜의 지지부진한 협상으로 수만의 조선 백성은 어려움을 겪었고 주권 없는 나라의 서러움을 당했습니다...ㅠㅠ
5년간 의병들의 선전에도 명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명의 문제는 바로 조선의 국경을 왜가 넘지 못하게 하는 평양성까지의 방어선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그 이상 내려가서 왜를 물리칠 이유가 없어 남쪽의 백성들은 왜의 노략질에 처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예방했다면 조금이라고 예비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 장웨이린교수는 강의 도중에 거북선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하며 이순신장군에게 가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자주보전,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부터 미래의 스마트팩토리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임진란을 막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음의 요소였을 것입니다.
첫째,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축소해서 준비했다면,
둘째, 유성룡의 세 장수 천거에서 이일장군을 상주에 주둔시켜 병력을 늘리고 훈련을 했더라면?
셋째, 지리적인 전술훈련을 체계적으로 했다면 신립장군이 조령을 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지난 역사지만 우리는 징비록으로 교훈을 삼기보다 병자호란을 맞는 우둔함을 보였습니다.
경제침략의 21세기, 설비관리의 예방보전은 모든 프로세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1592년4월13일 부산 앞바다,
총 9진 18만 명에 달하는 왜군이 침략하였습니다.
1군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으로 상륙하여 조령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을 하고,
2군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과 경주를 거쳐 함경도로 진격 후 한양으로 진격을 하고
수군인 구토 요시타카는 전라남도 해안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4월14일,
1군은 부산에 분산진성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왜군 장수들은 아침은 군영에서 점심은 부산진성에서 먹자고 이야기하였습니다.
18000여 명의 왜군은 쑤셔 놓은 불개미 집의 개미들과 같이 많았고 사나웠습니다.
이에 맞설 부산진성에는 정발 장군과 600명의 군과 백성들이 있었습니다.
정발 장군은 항상 검은 옷만 입고 있어 흑의 장군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검은 옷은 바로 수의를 이야기하며 전장에서 나는 죽으리라는 각오로 사는 장군이었습니다.
몇 시쯤 되었을까 부산진성에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왜군이 밀려왔습니다.
이미 왜의 침공을 알았지만 600명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습니다.
이때 사용한 것이 용발이, 쇠꼬챙이로 성문 앞에 뿌려서 적군이 밟으면 고통을 받고 쓰러지게 한 것이 첫 전투에 유용했습니다.
그것으로 점심을 성에서 먹자던 왜는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나 전력을 재정비했습니다.
18000명 때 600명, 그것도 부녀자까지 돌을 나르고 던진 싸움은 어린아이까지 다 죽는 결과를 맞았습니다.
정발 장군의 시신에서는 조선에도 이런 장수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동래 산성으로 갈 준비를 합니다.
4월15일,
고니시의 1진은 동래 산성으로 진격을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동래 산성은 3000명의 군사가 있는 그래도 큰 성이었습니다.
부산진성에서 피해를 생각해서 동래 산성은 그냥 지나가기를 바라던 고니시는,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못하겠으면 우리에게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성을 지휘하던 송상현 부사는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라는 글을 성문에 내 걸었습니다.
동래성은 하루도 못 버티고 고니시에게 내 주었습니다.
다행히 많은 백성은 뒷문으로 빠져나갔지만, 군사들은 처절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4월17일,
비로소 조정에 왜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류성룡은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장군이었던 신립은 이일 장군으로 하여 상주로 내려갈 준비를 하라고 명하고 상주에 군 소집령을 알리는 파발을 보냅니다.
4월19일,
조선의 중앙군 60명을 이끌고 이일은 말을 달려 상주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있어야 할 군사들이 보이지를 않았고 몇몇 백성들만이 있었습니다.
당시 군은 중앙에 집결하여 군 세력을 뽐내는 데만 열을 올렸습니다.
비상시에는 해당 장소에서 군사를 모집하고 한양에서 장수가 내려갔습니다.
100년 이상 평화가 있었기에 그런 체계와 기강은 무너져 있었고 이일 장군이 상주에 갔을 때도 이미 모였던 군사들은 왜의 소식으로 도망간 후였습니다.
하지만 의병장들이 상주에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4월25일,
상주 북천에는 나라를 위한 이병 800명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왜의 깃발이 보이고 조총 소리가 울리자 큰 함성과 함께 800 영웅은 적진으로 파고들어 적들을 베기 시작했습니다.
이일 장군은 전세가 불리함을 보고 몰래 문경 조령에 있는 신립장군에게로 도망을 갔습니다.
상주 북천전적지에 가면 당시 나라를 위한 분들을 회상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영웅을 기억해 보면,
윤섬, 홀어머니를 모시는 친구 대신으로 전쟁터에 나와 이일장군의 종사관
권길, 상주판관으로 피로 옷에 이름을 새겨 죽은 후 시신을 찾게 함
박걸, 권길을 도와 의병을 모으던 벗으로 권길이 죽자 그 옆에서 싸우다 전사함
이경류, 그가 타던 말이 피 묻은 옷과 유서를 물고 성남 집까지 달려옴
김종무, 류성룡의 매부로 전투를 위해 수백 리를 달려옴
4월28일,
신립장군은 예상 밖의 결정을 내립니다.
조령을 버리고 충주 탄금대로 병력을 옮기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신립의 병사는 8000명에서 16000명이라고 하였는데 매일 도망하는 군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조령은 천하의 관문으로 적이 3배가 아니라 5배 정도 많아야 넘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신립이 가장 아끼는 정예부대는 기마병으로 산속 전투보다 평야에서 달리며 싸우는데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전 병력은 탄금대로 이동하고 쉽게 조령을 넘은 왜군과 싸우다 도망한 몇 명 외에 다 전사를 하였습니다.
4월30일,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옮깁니다.
백성을 버리고 간 왕에 대한 분노로 한양의 궁궐은 불타버리고 5월2일 고니시는 무혈입성을 합니다.
당시 전쟁은 적국의 왕만 잡으면 끝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양을 함락해도 끝난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5월7일,
옥포/합포에서 이순신 장군이 도도 다카토리 수군을 박살내면서 비로서 진정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정유재란까지 명나라와 왜의 지지부진한 협상으로 수만의 조선 백성은 어려움을 겪었고 주권 없는 나라의 서러움을 당했습니다...ㅠㅠ
5년간 의병들의 선전에도 명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명의 문제는 바로 조선의 국경을 왜가 넘지 못하게 하는 평양성까지의 방어선만 지키면 되었습니다.
그 이상 내려가서 왜를 물리칠 이유가 없어 남쪽의 백성들은 왜의 노략질에 처참한 생활을 했습니다.
예방했다면 조금이라고 예비를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 장웨이린교수는 강의 도중에 거북선 사진을 학생들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이 없었다면 청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라는 말을 하며 이순신장군에게 가사를 표하고 있습니다.
자주보전, 스스로 한다는 것은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에서부터 미래의 스마트팩토리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임진란을 막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다음의 요소였을 것입니다.
첫째, 유성룡의 반대로 무산된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축소해서 준비했다면,
둘째, 유성룡의 세 장수 천거에서 이일장군을 상주에 주둔시켜 병력을 늘리고 훈련을 했더라면?
셋째, 지리적인 전술훈련을 체계적으로 했다면 신립장군이 조령을 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지난 역사지만 우리는 징비록으로 교훈을 삼기보다 병자호란을 맞는 우둔함을 보였습니다.
경제침략의 21세기, 설비관리의 예방보전은 모든 프로세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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