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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 사전

리더십: 당신이 존경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며칠 전에 천문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세종대왕보다는 한석규 씨 팬인 집사람의 요청이 있어서 케이블 TV로 봤습니다.

천문

당시 천문학은 대명 황제만이 할 일이라는 것이 사대부의 주장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중국의 절기를 따르기 때문에 농사가 번번이 잘 못 되는데도 말입니다.
사대부, 명나라에 볼모를 보내도 왕족이나 아니면 백성을 뽑아 보냈기 때문에 가장 RISK 없던 세력들...
갑자기 작년의 영화 제목인 기생충이 생각이 납니다.

『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고 했는가.
난 뿌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왕족과 사대부의 어떤 이도
뿌리가 될 순 없다.

나라의 뿌리는 거리 곳곳을 가득 채우는
저 백성들일 것이다.
하지만, 난 꽃이 되진 않을 것이다.
나는 뿌리를 기르는 거름이
될 것이다.

난 거름으로서 뿌리를 강하게 키우고자
우리의 소리를 담은 글자를 만든 것이고
그렇게 백성이라는 든든한 뿌리와 함께
조선이라는 꽃을 피울 것이다.

이것이 나의 답.
나 이도가 꿈꾸고 이룰 조선이다.』

세종대왕이 저렇게 이야기를 했을까?
그분이라면 저렇게 이야기를 했을 것 같습니다.
당뇨가 너무 심해서 눈이 안 보이고 다리가 썩어 들어갔지만 왕이기 때문에 다리를 자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삶을 위해서라면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제도화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세종대왕께서 육아 휴직을 준 것을 아십니까?
그것도 노비이면서 아이의 엄마뿐 아니라 아빠에게까지 휴가를 주라는 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시행하는 관청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은 사례가 많았지만 말입니다.

여주에 가면 세종대왕의 릉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대라고 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릉에 가 보면 오가는 날 짐승 외에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지난 1월 베트남에 갔을 때에 호찌민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보았습니다.
하노이에 호찌민 묘소까지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들어가 보았습니다.
왜 저들은 그분을 그렇게 존경할까?
세종대왕보다는 못했지만 같은 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호찌민의 보존된 시신을 보려고 줄을 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도 자신들이 존경하는 분이라고 묘와 누워있는 모습을 보게 합니다.

며칠 전 리콴유 싱가포르 수상에 대한 일 년 전 글을 올렸습니다.

[1년 전 오늘]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 내가 유일하게 포기한 것이 있었다면, 내 삶이었다.

리더십에 대한 준비를 했을 때에 썼던 글 같습니다. 리콴유그는 어떤 리더십으로 지금의 싱가포르를 만들었...

blog.naver.com

이 분의 유명한 유언은 '내 집에 기념관을 세우지 말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은 땅덩어리가 작은 싱가포르에서 집값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하는 정책을 비난하고자 하는 글은 아닙니다.
지금 정부는 나름대로 서민이나 청년에게 안정된 집을 주려는 마음이겠지만 사유재산이 무너지는 것을 그냥 보고 좋아할 국민은 없으니 안타깝습니다.
리콴유 수상은 주변의 집을 허물라고 했습니다.

왜?

도시계획을 바꿔주어야 주변에 건물도 새롭게 지어지고 땅값도 올라 서민들이 좋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국민들이 입고 자는 것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런 싱가포르는 사진처럼 샌즈 호텔을 랜드마크로 한 아름다운 도시국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찌민 주석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항상 마오쩌둥(모택동) 주석도 이야기를 합니다.
그분도 중국인들이 제일 존경하는 분으로 노무현 대통령께서도 존경한다는 말씀을 하셨던 분입니다.
중국 국민들에게는 호찌민 주석과 같은 삶을 살려고 했지만 중국도 내란이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많은 동족을 죽이는 오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1949년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에 있는 조선족으로만 편성된 중공군 2개 사단을 보내달라는 요청에 응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 중공군들은 바로 625 전쟁에 투입되어 동포끼리 죽고 죽여야 하는 슬픈 역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존경하는 인물로 특히 리더십이라는 명분으로 이야기를 꺼려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분을 이야기하라고 하면 이순신 장군과 정조에 대한 이야기를 꼭 하려고 합니다.
그중에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모든 강의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분의 난중의 상황이나 생각 그리고 전략/전술에 대한 것, 끝으로 리더로서 백성을 위한 그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이순신 장군이 있게 한 분이 바로 정조입니다.
그래서 정조가 왕으로서 왕권이나 왕족에 대한 신화를 만들기 보다 200년 전 한 백성이자 신하였던 사람을 생각하고 글로 남기려고 했다는 것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우리 역사를 바로 찾아서 기록을 해서 후손에게 알려주려는 노력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난중일기

여러분은 난중일기를 누가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순신 장군?
여기서 이순신 장군이 아니라고 해야 서프라이즈인데 이순신 장군이 쓰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1792년에 정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올해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200년 되는 해요. 당시에 이순신 장군이 아니었다면 우리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오. 이충무공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분을 영의정으로 추증하도록 하시오."

​추증이라는 것은 나라에 큰 업적이 있는 죽은 신하의 벼슬을 높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장군이 돌아가신지 40여 년이 지나서였으니 과거에는 그런 일이 많았나 봅니다.
정조는 자신이 사용하는 예산과 왕궁의 예산 일부를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찾아서 책으로 만드는데 사용하라고 내주었습니다.

​1795년 마침내 14권 8책의 이충무공전서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저도 항상 헷갈리는 것이 있는데 '권'과 '책'입니다.
권이라는 것은 집필을 하면 권이라고 분류를 먼저 합니다.
그리고 그 권을 두께에 따라 묶은 것을 책이라고 합니다.
즉 14권은 14개의 주제로 분류한 것을 8개로 묶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많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가 들어갑니다.
그중에 하나가 이순신 장군의 일기인데요, 장군께서 교보에서 난중일기를 보셨다면 '누구의 일기이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즉 난중일기의 저자는 정조라고 봐도 무관합니다.
난중일기 안에는 장군이 연도별로 적은 일기들이 들어갑니다.

임진 일기, 병신 일기, 정유 일기 등

장군의 기록에 대해서 남아있는 또 하나의 기록은 바로 징비록입니다.
1598년 11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그날에 류성룡은 간신들에게 탄핵을 당합니다.
정말 간신들이 그렇게 한 것인지, 아니면 선조가 광해군과 류성룡에게 조선을 맡기고 도망했던 것을 수습하려고 했던 것인지 모르지만 류성룡은 고향으로 쫓겨 갑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전란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으로 징비록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어린 시절과 성품 등이 들어가 있습니다.
류성룡이 장군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또 이것을 보고 학연/지연이 팽배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지연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로 대화를 할 수도 있었다는 끔찍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