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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관리와 설비관리

명량해전 뒤 36계 줄행랑을 쳐야 했던 수군, 그들에게 징비만 됐더라면

10월의 섬 바람은 차게만 느껴졌다.

이틀을 열이 나고 온몸의 통증으로 누워있던 이순신장군이 스며드는 달빛에 몸을 일으켰다.
고문과 옥살이로 주기적으로 통증과 열로 앓아눕는 것을 모르는 부하는 없었다.
얼마나 올라왔을까 명량해전의 마지막 총성이 들리고 12척의 배는 서해안으로 올라갔다.
누구는 군산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누구는 목포 앞 고하도까지 갔다고 한다.

한 달 전 명량해전을 떠 올리면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다.

선조에게 올린 장계에 쓴 글은 이순신 장군의 다짐을 볼 수 있었다.

"전하, 제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사옵나이다."


조선 수군에 남은 12척으로 남해안을 지키기는 어려워 계속 뒤로 쫓겨 갔다.
다다른 곳은 울돌목까지, 해협으로 조류가 빠르고 소용돌이가 쳤다.
일본해군 제독인 내도 도리는 이번만큼은 이순신을 꼭 잡겠다고 큰소리쳤다.
조선 수군은 12척이었지만 생소한 수로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울돌목에서 서로를 마주 보던 일본 전함은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일본의 수를 본 부하 장수들은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오직 이순신장군이 탄 배만 홀로 들어오는 배와 싸우기 시작했다.

기록으로 보면 왜 수군은 133척에 약 8000명이 넘는 군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순신장군이 싸우는 것을 본 부하장수들이 합세를 하여 물살에 갈팡질팡하는 왜를 격파하였다.
133척 중 30여 척이 침몰당하거나 대파되고 나머지는 물러났다.
왜가 물러난 것까지가 명량해전의 대승에 대한 기록이다.
 

 

지금부터는 전라도까지 모든 해안을 왜에게 내주는 기록 없는 패전의 이야기다.

전투는 지금부터라는 것을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충청도까지 진격하던 왜 보병이 전라도 서해안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명량해전의 패전으로 분노하여 아산의 이순신장군 본가까지 자객을 보낸다.
본가에서는 막내아들 면이가 있었다.
가족을 보호하겠다고 왜군과 대적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순신장군은 난중일기에 그때의 심경을 아래와 같이 썼다.
“간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옳은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이것은 이치가 잘 못 된 것이다.”

아들의 전사 소식에 슬퍼할 틈도 없었다.
왜 수군은 재정비하여 이순신장군의 13척을 잡으러 진도로 왔다.
조선의 12척은 서해안이 왜 보병에 떨어지자 북으로 피하였다.
9월 중순 영광까지 올라갔다가 바로 군산 앞바다까지 올라갔다.
이때 비로소 왜군은 육군과 수군이 힘을 합쳐서 전라도를 손에 넣는다.
약 한 달간 전라도까지 바다는 왜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1597년 10월이 넘어 이순신장군은 진도로 내려와 불타버린 군영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설비관리를 하면서 Cost와 관계가 많은 것이 Stock이다.
공무부서는 Spare part에 대해서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하고 관리부서에서는 자재 자체의 비용뿐 아니라 유지관리를 위한 비용이 들어가니 하나라도 줄이려고 한다.
공장을 운전한지 40년이 넘어도 아직도 적정재고, 적정 Spare part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
또 한가지 Annual Shutdown(년차보수작업)이다.
수십 년을 했는데도 아직 데이터베이스가 없는 공장이 많다.
일상 정비했던 데이터와 연차보수작업 그리고 예방보전했던 데이터들이 관리된다면 전체 공장을 빠트리는 설비없이 관리가 되고 불필요한 작업은 안 하거나 주기를 늘려 줄텐데,…

12척의 조선 수군이 울돌목에서 모든 것을 사용해서 싸운 후 바로 쳐들어오는 왜군에 대해서는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예비군대가 없었고, 배를 수리할 수도 없었다.

2025년 이후에 대한민국 제조 공장에는 장수들이 빠져나간다.
이를 대비하지 않고는 기업의 존속도 보장할 수 없는 위기가 온다.
징비만이 그때의 위기를 넘기게 할 것이다.

》Advanced Advisory for Abnormal Condition